
소나타 소네트
Sonata Sonnet
/푸른모래
‘장소, 자네는 달과 같다네.’
요요한 달빛이 폭포수처럼 부서져 내리던 어느 날 밤, 린신은 사붓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그렇게 말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저 달처럼 자네도 변할 수 있어.’
린신은 휘광처럼 달빛을 온몸에 두른 채 그렇게 말했다.
‘알겠는가? 자네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일세.’
그렇게 말하는 린신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하여, 매장소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버렸다.
‘하지만 린신.’
그림처럼 살풋 미소 지은 매장소는 두 손으로 얌전히 찻잔을 받쳐 든 채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믐달은 다시 그믐달이 되고 보름달은 다시 보름달이 되는 것처럼 매장소는 결국 매장소가 되어 버린다네. 자네는 나더러 달이 아닌 태양이나 별이 되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 하지만 태양은 임수였지 매장소가 아니네. 나는 태양이 될 수 없어.’
다정하지만 단호한 거절. 매장소는 아름답게 웃었다.
‘알겠는가? 내 운명에 대한 이야기일세.’
린신은 수려한 눈썹을 찌푸리며 매장소를 노려보았다. 매장소는 모른 척 예쁜 미소만을 지으며 그런 린신을 마주 바라보았다.
‘자네는 아주 못된 사람일세.’
린신이 투덜거렸다.
‘정말 아주 나쁘고, 못된 사람이야.’
그러고 술잔을 기울이는 린신의 얼굴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고 서글픈 기운이 어려 있어, 아주 오랫동안 매장소의 마음을 못내 아릿하게 만들었다.
매장소는 눈을 떴다.
매장소는 어리둥절한 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희뿌연 안개로 뒤덮인 절경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대체 어째서? 매장소는 저도 모르게 한 쪽 손으로 제 팔을 움켜쥐어 보았다. 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뿐했다. 매장소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죽었구나. 드디어.
매장소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서늘한 안개로 둘러싸인 바위는 축축하고 차가웠다. 그러나 평소 그 정도의 한기만으로도 온 몸을 찌를 듯이 덮쳐오는 통증에 시달리곤 했던 매장소로서는 놀랄 정도로 상쾌한 기분만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매장소는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하릴없이 바위 아래에 난 산길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갔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것 같은 길을 따라가자 안개 사이에서 운치 있게 지어진 누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역시나. 매장소는 속으로 신음성을 삼켰다. 죽음 뒤의 세계에서 랑야각을 보게 될 줄은 몰랐으나 막상 보게 되니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제 이 누각의 문 뒤에서 저승사자 내지는 염라대왕이라도 나타나는 걸까? 매장소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문 앞을 서성거리며 안쪽을 기웃거렸다. 혹시 아는 얼굴이라도 나타난다면.
그러나 문 너머에서 나타난 이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매장소는 실망을 감춘 채 자신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이는 노인에게 천천히 마주 공수했다.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매장소는 노인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찌 찾아왔느냐니, 그것은 응당 그쪽에서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매장소는 공손히 대꾸했다.
“이곳에 볼일이 있다면 하나 뿐 아니겠습니까.”
잠시 매장소를 빤히 응시하던 노인은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안쪽으로 몸을 틀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매장소는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는 노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예전 같으면 반도 가지 못해 헉헉거렸을 길이었으나 지금의 매장소로서는 어렵지 않게 노인의 발걸음을 쫓아갈 수 있었다. 매장소가 새삼스럽게 감격에 젖어 있을 무렵, 노인은 한 자그마한 별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매장소는 한 쪽 눈썹을 치켜뜬 채 지나칠 정도로 익숙한 모양새의 건물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안에 아뢰겠으니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마침 현재 각주께서 출타중이시어.”
각주? 그러나 매장소가 미처 제 물음을 입 밖에 꺼내기도 전에, 별채의 장지문이 벌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버지께서 출타 중이신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 평소에는 아버지가 랑야각에 착실히 붙어 계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매장소는 말문이 막힌 채 제 앞에 비딱하게 팔짱을 끼고 선 앳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청년은 눈을 깜빡이며 한 손으로 방자하게 턱을 긁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제 앞에 선 매장소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옆에서 노인이 얼른 허리를 숙였다.
“랑야각에 볼일이 있으신 객이라 하여.”
“예까지 오는 객들은 보통 다들 랑야각에 볼일이 있지.”
목소리가 냉랭했다. 평가하듯 날카로운 눈으로 매장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던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린신이오.”
매장소의 입술이 벌어졌으나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린신의 미간이 점점 더 찌푸려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매장소가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대답했다.
“매장소입니다.”
매장소가 천천히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며 덧붙였다.
“소각주.”
펄럭거리는 푸른 장포를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긴 머리칼을 아름답게 늘어뜨린 약관이나 겨우 되었음직한 앳된 청년. 린신은 매장소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상에 지쳐 나는 그저 사라질 작정이었다지.
다만 내가 죽으면 내 사랑을 홀로 내버려두게 되어서.